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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평

《문장수집생활》 — 잡독을 부끄러워하던 내가, 문장 수집이라는 무기를 얻었다

문장수집생활 서평 - 돈 안 되는 가장 우아한 사치

고백하자면 저는 책을 좀 산만하게 읽는 편입니다. 한 권을 진득하게 끝내기보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읽곤 하는데, 그때마다 스스로를 '집중력이 부족한 잡독가'라며 조금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그 부끄러움이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문장수집생활》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저에게, 뜻밖의 무기 하나를 쥐여준 책이었거든요.

저자 이유미는 온라인 편집숍 29CM의 카피라이터입니다. 이 책은 그녀가 편애하는 50편의 소설 속 문장이, 그녀의 손을 거쳐 50개의 광고 카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독서 습관, 창의적 필사법, 일상 글쓰기 노하우까지 곁들여서요.

소설로 카피를 쓰는 사람

가장 신선했던 건 저자의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소설을 읽으며 공감되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그걸 타이핑해 파일로 모아둡니다. 일종의 문장 수집이죠. 그렇게 쌓인 문장들이, 급하게 카피를 써야 할 때 훌륭한 재료가 됩니다.

예를 들어 그녀는 김혜진 소설의 줄넘기 장면에서 "줄은 쉬지 않고 되돌아오고, 나는 멈추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 수 있었다"는 문장을 발견하고, 이를 "제자리에서 그녀를 잊는 법"이라는 카피로 바꿉니다. 흥미로운 건, 정작 카피에는 '줄넘기'도 '운동'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죠.

무의식중에 그냥 사용한 단어는 집요하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고민 없이 쓰면 관성적인 표현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소설을 읽는 취미가 카피라이팅이라는 일이 되는 이 과정을 보며, 저는 '성공한 덕후'란 이런 거구나 싶어 부러웠습니다. 일과 취미의 완벽한 병행이었으니까요.

잡독은 잘못이 아니었다

이 책이 저를 위로한 건 독서 습관에 대한 대목에서였습니다. 저자는 책을 마치 TV 채널 돌리듯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다고 합니다. 읽는 책의 종류에 따라 보는 시간대도 다르고요. 저도 늘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며 읽으면서 '집중력이 부족한가' 자책했는데, 저자는 그걸 전혀 다르게 봤습니다.

고유한 독서 습관에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것. 이 시각이 놀라웠습니다. 그 뒤로 저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여러 권을 동시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드라마 보듯 조금씩 아껴 읽고, 두꺼운 책은 다큐멘터리 한 편 보듯 한 챕터씩 덮어두고, 좋아하는 책은 정주행하듯 여러 번 다시 보고요. 산만함이라 여겼던 습관이, 나만의 리듬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문장 수집이라는 정신적 사치

이 책을 읽고 저도 소설을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다 읽은 뒤 포스트잇이 붙은 문장들을 다시 읽으며 타이핑하는 습관이요. 신기하게도, 소설가들은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더군요. 평범해 보이는 일상적 문장에도 겹겹의 의미가 덧입혀 있었습니다. 그런 문장을 손으로 옮기다 보면, 뿌옇던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졌습니다.

예전엔 우표수집가를 보며 '저런 걸 모아서 뭐 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수집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고, 모아둔 것을 넘겨보면 그것을 처음 발견하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문장 수집은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래서 좋았습니다.

돈이 되지도 않지만 돈이 들지도 않는, 일종의 정신적 사치.

사실 이 블로그에 서평을 쓰며 좋은 문장을 옮겨 적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저만의 문장 수집인 셈입니다. 저자는 필사를 이렇게 권합니다. 좋은 문장을 부지런히 따라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체를 흉내 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 모방을 충분히 거친 뒤에야 비로소 나만의 것이 탄생한다고요. 글쓰기를 배운 적 없지만 글 쓰기를 즐기는 저 같은 사람에게, 수집한 문장들은 훌륭한 스승이 되어줍니다.

좋았던 점과 아쉬운 점

가장 좋았던 점은 세 가지 재미가 한 권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카피라이터가 어떤 문장에 주목하는지 엿보는 재미, 그 문장이 카피로 변신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글 잘 쓰는 법을 배우는 재미. '다르게 본다, 다르게 쓴다, 다르게 산다'는 책의 구성처럼, 평범한 것을 낯설게 보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됩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이 책은 체계적인 글쓰기 이론서가 아니라 카피라이터의 감각적인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글이 는다'는 명확한 방법론을 원하는 사람에겐 다소 단편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 예시로 든 카피와 문장들이 저자 개인의 취향에 기대어 있어, 공감의 폭은 읽는 사람에 따라 갈릴 수 있고요. 하지만 애초에 이 책은 정답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문장을 대하는 태도를 슬쩍 바꿔주는 책입니다. 그 점에서는 더없이 사랑스럽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분, 그리고 저처럼 산만한 독서를 부끄러워하던 분께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작은 책 덕분에, 문장 수집이라는 조용한 취미 하나를 얻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습관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듯, 별것 아닌 이 습관이 고단한 일상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어주더군요. 그리고 언젠가는, 제 손끝에서도 수집이 아닌 창작의 문장이 돋아나기를 기대해봅니다.


개인적인 독서 경험과 감상을 담은 서평이며, 책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